Aug 28, 2013

나는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후 언어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고문을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고문이란 고문 기술자, 이 씹할 놈과,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피고문자 사이의 벼랑 끝에 선 필사적인 언어 게임이다.
지겨울 정도로 단조로운 Q&A 형식으로 구성된, 고문을 하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에 교환되는 대화의 텍스트는 몸통을 옥죄고 비틀어대면서 짜내는 고통스런 기표로부터 추출된 언어의 조작이다. 그 텍스트는 기의와의 일대일 대응이 숨겨져 있거나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거짓된 양피지 문서이다. 바로 이런 언어, 고문의 텍스트가 나의 몸과 현실을 통제하고 명령하며 결정했던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시인으로서 내가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내가 겪었던 바로 그 고문의 문법을 통하여 나타났다. 놀랍게도, 자국민의 피를 흠뻑 적신 신군부 정권, 이 악의 정당은 스스로를 민주정의당이라고 명명했고, 그 순간부터 이 군정의 모든 담론은 모순과 아이러니의 기괴한 코메디가 되었다. 언론을 철저히 장악한 신군정은 과거 박정권보다 더 혹독하게 모든 표현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를 박탈하고 문학과 예술을 낱낱이 검열했다.

만일 운명적으로 그들과 동일한 언어적 형식을 가진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고 그들과 동일한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내가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과 나눠 쓰는 언어가 거짓말, 위선, 위장, 속임수의 상징조작의 도구로 선점되어 있는데,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한글’이라는 랑그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의 근본이 현저히 위협받았던 일제 식민시대에서는 한국어로 시를 쓰는 행위만으로도 굳이 “민족의 언어를 순화한다”는 기능을 고려할 필요도 없이 시가 존재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언어는 존재하나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버려진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끄러운 침묵’이 모든 담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 판에서 “내가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과 미국의 시인들이 “전통적으로 공적 언어의 명확성, 날카로움과 시적 언어의 정확성, 신뢰성 사이의 연결선을 인식해 왔음”에 반하여 한국에서는 동일한 언어 안에 공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에 생리적인 길항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난 어떤 형식의 공적 언어도 신뢰할 수 없었고,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의미에 절망했다. 나의 시적 전략은 “모든 종류의 가짜 표상과 표리부동의 원천”인, 언어의 도구적 사용에 제동을 걸고, 그것을 해체하고, 교란하는 것이었다. 즉, 나의 전략은 공적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구문을 파열시키고 조각조각 찢어놓는 것이었다. 문장 가지의 파편들을 인용하고 그것들이 어울리지 않게 보이게 만듦으로써 도구로 전락한 언어의 어처구니 없음에 제동을 걸고 싶었다.

나의 시적 해체 전략은 결국에는 선(禪)의 정신과 만났다.
이는 선적인 마인드 자체가 해체주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 문답에서는 이전에 말했던 것이 끝없이 제거되고 초월된다.
불가피하게 기존 시 형식을 위협하거나 훼손시킬 수밖에 없는 나의 시적 해체 과제는 도구적 언어를 그 요소들로 환원하되 동시에 거기에 남은 것들은 최소한 시적이어야 한다는 문제를 남겼다. 그 잔여물에 대한 문제는 “무엇이 어떤 것을 시적이게 하는가?”와 “무엇이 언어를 시적이게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리 끝에 나는 “어떤 것을 시이게 하는 것은 ‘시적인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시적인 것은 언어의 안쪽에도 있고 그 바깥에도 있다.
그것은 어떤 암시 또는 힌트, 어떤 기미나 몸짓, 어떤 신호의 깜박거림으로 세상에 편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는 언어라는 매개체에 기대어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언어의 창조 자체가 시라고 믿지는 않는다. 또한, 기쁨, 분노, 희열, 슬픔, 고통과 같은 특정한 심적 상태가 시적 외관의 자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한 심적인 지표들은 단순히 시적인 것에 대한 반응이거나 효과일 따름이다.
시적인 것은 정서적인 것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시적 리터러시는 언어적 능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시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적인 것은 선과 유사한 점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와 선은 언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예술의 모든 형식 가운데 시는 가장 가난한 미디움을 사용한다.
시는 겨우 말한다.
시의 뜻은 다 말해버린 것보다는 오히려 말하지 않은 것의 여백에서, 즉 침묵에서 빛을 발한다. 참선도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 즉 명상 중에 떠오르는 수많은 문장들과 개념들을 ‘지우개 아래의 언어(Language Under Erasure)’ 방식으로 날려버린다.
그것은 끝없이 언어를 해체한다.
선승들은 침묵 속에 있는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되 사실 어휘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사들은 그러한 가르침에서 남은 찌꺼기를 씻어내듯 종결하는 의미에서 게송(偈頌)이라는 짧은 시를 낭송한다.
그러나, 명상을 위해서 선은 여전히 언어적 개념인 ‘명상의 주제’, 즉 화두(話頭)에 의존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이든 선이든 일단 ‘말할 수 없는 것’이 자리하고 있는 지붕 꼭대기에 이르면 사다리를 버린다. 그 뾰족한 지붕의 꼭대기에 달린 피뢰침에는 번개와 같은 정신의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다. 피뢰침은 닿는 순간, 눈이 멀 정도로 환한 빛을 발하며 우리를 송두리째 새까만 숯덩이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 아마도 시적인 것은 그러한 천상의 섬광을 지상으로 이어주는 전도체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해탈이라 부르던 자유라 부르던 간에 아마도 그것은 의식의 순간 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통제불능의 정신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런 연유에서 우리는 호머 이후 2,800년 동안 아직도 계속 시를 읽고 쓰면서 본 세미나와 같은 토론에서 시의 판자들을 켜보는 것이리라.
 

황지우 - <나의 문학을 말한다 : 피뢰침>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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